누구나 건강하기를 원한다. 건강은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가장 큰 원동력이며 목적이다. 건강한 사람에게서 보여 지는 탄력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과 그 자태는 아주 오랜 시간 우리 현대인들의 로망이 되어 왔다.
좋은 자세, 바른 자세, 우아한 자세, 멋있는 자세, 섹시한 자세 등등…….
어려서부터 수많은 이미지들을 통해 인식되어왔다. 여러 형태의 암시와 설정으로 올바른 것은 이러한 것이라는 기준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깨와 골반의 높이, 척추의 만곡, 팔과 다리의 길이들의 좌우균형과 대칭을 기준한 수직정렬의 구조적 연결성을 역학적으로 대입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마치 인간 또한 기계와 다를 바 없으리라는 낮은 수준의 물리학과 산업혁명의 이미지가 유기적 생명체에까지 투영된 것이다.
이렇게 구축된 개념은 의학교육에 적용되어 의심 없이 학습된 의사의 처방과 교육을 뒤따라야 했으며, 운동치료와 물리치료의 주제가 되어 억지스럽게 근육을 단련하거나 관절을 조작하는 것에 학문적 가치를 부여하기에 바빴다.
과연 ‘몸’이 인간이 만들어낸 균형과 대칭의 수학적 개념 안으로 들어가 원하는 대로 무조건 결과를 도출해주면 된단 말인가? 우리는 아무런 이견도 없이 수많은 자세교정을 위한 처방을 받고 무조건 열심히 하려한다.(doing). 빠르고 효과적인 결과를 기대하며 순진하게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뿐, 자기 자신과의 진정한 교감과 자각은 무시된 채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적으로 행위한다. 자신의 권위를 타인에게 넘긴 체 자동인형처럼 반복 운동하는 무감각한 존재로 전락될 수도 있다.
F. M. 알렉산더는 매우 해로운 자세의 하나로 “똑바로 곧곧히”하는 모든 노력이 깃든 자세들이라 지적했다. 어려서부터 “허리펴, 똑바로 앉아, 어깨펴, 앞을봐”등 무언가 똑바로 해야 정상이라는 것이 이미지화되고 교육적으로까지 강제되어온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의식이 되면 자신도 모르게 허리에 부적절한 힘을 모으고, 어색한 줄 알면서도 어깨를 폈으며, 입을 굳게 다물고 정면을 응시해야 했던 것이다.
알렉산더 테크닉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 속에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들이 잠재되어 있음을 자각케 한 후, 해로운 긴장과 그 연쇄적 반응 고리를 끊는데서 시작한다.
“잘못된 것을 그만두면 올바른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이 원리는 인위적으로 잘못 학습된 습관을 자제하면, 자연이 우리에게 제공한 가장 온전한 것이 아무런 노력 없이도 이루어져간다는 이치이다. 바른 자세를 만들려는 인위적인 노력이 습관화되면, 오히려 더 오래 해로운 긴장이 몸에 축적된다. 정작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긴장을 해소시킬 수 있고, 지속되는 이 반응을 행위하기 이전에 멈추어 생각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이다. 이것은 오직 재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탈학습의 과정이 학습위에 올려져 새로운 조건이 수립되어야 비로소 잘못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구부정해진 척추나 앞으로 굽은 어깨를 펴기 위해 그 반대쪽으로 물리적 힘을 가하는 힘겨운 싸움을 포기해야한다. 그렇게 조작하여 만족스러운 노력의 결과를 얻고 싶겠지만, 몸의 지혜를 따르지 않은 외적 자극과 노력은 무의미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몸은 언제나 마음의 소리를 듣고 있다.
자세를 바꾸는데 에도 몸과 마음을 동시에 관찰하고, 그 속에서 무언가 발견되어 나올 때 비로소 가능하다. 마음의 지시가 바뀌어 몸의 탄성적 틀이 해소를 허용하면서부터 억압된 신경충동과 과잉 반응을 요구하지 않게 된다. 몸과 마음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생명체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이 회복되어 몸의 정신성인 마음이 온전한 기능을 수행할 때 몸의 물질적 경험 또한 달리 하게 되는 것이다.
자세는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이며, 지금 현재의 몸과 마음의 표현이다. 몸과 마음의 통합 없이 물리적 노력으로 시행된 모든 작업은 실패하였다. 이제 자세의 패러다임이 바뀐다.
“올바른 자세는 없다. 올바른 디렉션이 있을 뿐이다.”
- F. M. 알렉산더-